거듭난 사람(창48:1-10)
마귀는 우리에게 편견과 선입견을 집어 던져 넣습니다.
마귀가 공격을 하는데 이것이 세상에도 베어 있습니다.
마귀의 생각과 세상의 생각이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매사를 좋다 나쁘다로 판정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원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선과 악을 가르는 것 아닙니까? 매사에 좋다 나쁘다로 나눕니다.
심지어 날씨를 향해서도 날씨가 좋다 나쁘다로 외칩니다.
계속된 햇빛이 사막을 만든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남해의 녹조가 있을때 태풍이 와서 다 녹조를 고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좋고 나쁜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유익한 것입니다.
사람을 볼때도 사람도 다 유익한데
좋은사람 나쁜 사람, 좋은 행동 나쁜행동으로 정죄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계속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선악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떤 일이 생길때 원망합니다.
사람들을 처다볼때는 정죄합니다. 항상 남을 욕을 하고 다닙니다.
가만히 보면 원망하는 사람들이 정죄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원망합니다.
우리 인생에 주시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들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사실 감사할 것 들입니다.
유익하기 때문에 주시는 것들인데
그것을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주는 선악과 원죄의 특징인 것입니다.
특별히 병과 죽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병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일수 있습니다.
병 걸려서 깨닫게 되고 은혜를 받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은 무조건 나쁜것이다.
죽음은 나쁜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마귀라는 것입니다.
죽음도 천국가는 통로인데 왜 나쁜 것입니까?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내용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생각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좋다 나쁘다고 쉽게 판단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사람들은 거기서 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거듭난 사람은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오늘 야곱이 병들었습니다.
147세로 천국에 가야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왜 좋고 나쁜 것입니까? 죽음은 인생의 과정인 것입니다.
1-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야곱이 병들었습니다. 죽을때가 되었습니다. 침상에 앉아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병이라든지 죽음을 좋고 나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정으로 받아드립니다.
그의 삶은 선악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말씀 붙들고 사는 인생의 특징은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할수 있는 것이면 순종하고 할수 없는 것이라면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선악과 인생과 말씀의 인생이 차이점은 좋다 나쁘다 선악과 인생입니다.
이것은 거듭나기 이전의 삶과 똑같습니다.
어떤 일이 왔을때 말씀 붙들고 사는 사람은 믿음의 인생입니다.
야곱은 루스에서 하나님 만나고 평생 말씀 붙들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3-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게 배고 잘때 벧엘(=루스) 에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창28: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리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다 허락하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야곱은 정리하면 내 인생은 말씀 붙들고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할수 있을때는 순종했고, 할수 없을때는 신뢰하고 맡기고 살았습니다.
선악과 인생에서 말씀인생으로 바뀐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거듭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구에게 질문을 받았을때 좋아요 나쁘다로 대답하지 말고
할수 있으면 순종하고 할수 없으면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된 인생인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인생인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할수 만 있으면 축복하고 할수만 있으면 예배드렸습니다.
이것이 변화된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신앙인이 우리가 살아갈 모습입니다.
야곱이 마지막 할수 있는 일이 일어나서 요셉의 두아들을 축복합니다.
10-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2. 거듭난 사람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축복할 수 있습니까?
자기 안에 은혜가 충만함이 있을때 축복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불만이 있거나 억울함이 많은 사람은 축복할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선악과로 살아온 사람은 내 중심이 강하기에
못 마땅함이 많기에 축복할 여유가 없습니다.
내 감정에 묶여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 감정을 다스릴 수 없어서
축복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살아가는 뿌리는
아직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내 감정을 잘 다스릴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차서 넘치므로 이웃을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감사, 감동, 감격이 넘처나서 은혜가 넘처나는 것입니다.
내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처나서 남들을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넘처난다는 것은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은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감사하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은혜를 깨닫은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안해도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은혜로 변화되어야 진짜 거듭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아무리 형식적으로 철저해도 겉으로만 변화된 것이지
진짜 본어게인 된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보니까 자기 형제들이 이곳에 와서는 안되겠다고
지옥에 가면 물 한방울도 얻어 먹을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천국에 가있는 나사로를 보내서 형제들을 전도해 달라고 합니다.
지옥의 두려움으로 인한 변화는 진정한 변화가 아닌 것입니다.
지옥이 무서워서 교회생활하는 것은 변화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말씀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축복은 축복하자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변화가 되어서 축복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영혼은 축복이 생활화 되는 것입니다.
왜 아이들이 삐뜰어 나갑니까? 왜 방황합니까?
욕을 먹고 축복을 받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에게 욕먹고 상처받은 아버지가 계속 자기 자녀에게 폭행합니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하면서 계속 전승이 되는 것이니다.
이것을 가계에 흐르는 저주일수 있습니다.
이 저주의 고리를 끊어야 가문이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처받은 아이드은 학교에 가면 일진이 되어 주먹쓰면서
동료들에게 돈 뜯어 내고 늘 싸움하고 힘자랑하며 살아갑니다.
어른들은 결혼하면 배우자를 폭행합니다.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계속 상처로 인해 폭력적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그 상처를 감당하지 못해서입니다.
상처를 끊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앞에 나오도록 이끌어야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축복하고 예배하다 보면 누구나 변화가 일어납니다.
야곱도 저주하는 인생에서 축복하는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3.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을 간증합니다.
첫째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섬기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같이 걸었다는 뜻입니다.
같이 걸었다는 것은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함께 걸었던 하나님입니다.
바리새인 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이 최고라고 하는데
생활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습니다.
둘째는 나를 기르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목축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 하나님은 나의 요세, 하나님은 나의 소망,
야곱이 아는 하나님은 나를 기르신 하나님입니다.
전쟁터에서 위기에서 체험하신 하나님입니다.
내가 위험에 있을때 보호하시고 고
내가 곤경에 처했을때 피할길을 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째 나를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환난은 악(=마귀)으로부터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나쁘게 만들고 악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를 악에서부터 구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야곱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본것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깃발을 보면서 바람이 있구나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보고서 저들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우리가 깃발이 되는 것입니다.
깃발=여호와 닛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증명되고 증거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운 환난에서도 굳굳하게 살아남을 때
불신자들이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는 분이구나 !!!
유대인들은 오른손을 왼손보다 귀하게 여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셉도 아버지 야곱이 엇깔려 축복할때 말립니다.
18-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19-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세상질서는 위계 질서입니다. HIERARCHY입니다.
만나면 나이 몇살이야 직분이 뭐야 장로는 높고 집사는 낮고 이것은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hierarchy가 아닙니다.
높고 낮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네트워킹입니다.
연결해서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것입니다.
세상은 누가 높으냐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약한 사람을 불러 쓰십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있어서 이방인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해도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순종하는 자를 쓰십니다.
세상은 우월감이 있어서 강한자 힘있는 자 잘생긴자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장애인도 괜찮고 머리 안좋아도 괜찮고
병들어도 가난해도 부족해도 늙어도 못생겨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 신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순종하므로 야곱처럼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큰 주제는 선악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좋다 나쁘다로 살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좋다 나쁘다로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말씀 앞에 순종하느냐 신뢰하느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걷는 인생입니다.
순종과 신뢰를 통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제2의 야곱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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