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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pastor's heart

by samoa 2023. 4. 11.

 

목회자의 심정(엡1:17-19)

 

한 사람의 수준을 가름할때 그 사람의 관심사를 보면 됩니다. 

대화를 하다하다 보면 관심사가 금방 나옵니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골프에 대해서, 반려건에 대해서 

커피에 대해서 조애가 깊습니다. 

목회자나 신자의 수준은 기도를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느냐 보다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한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보면

그의 목회적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17-19절까지 바울의 목회적 기도가 나옵니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바울의 최대의 관심사가 나와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오. 

에베소교회는 막 태어난 신생교회입니다.

회심을 했지만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할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행17장에 아덴이란 곳에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느 지역을 가는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글귀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믿기는 하는데 자신이 믿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 그리스도의 문화가 팽배했던 시대입니다. 

그런 문화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쉽게 알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을 뛰어넘는 곳에 계신 분이십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싶어도 그 하나님을 다 알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욥11:7-9,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인간은 성경이 말씀하신 부분까지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최대한 관심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물질적인 복,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참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참 복을 모릅니다. 복이 아닌것을 복으로 알때가 있습니다.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알아야 그 복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복을 이해되어야 복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신앙이 자라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만큼 자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정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정보나 펙트나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 다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바이든 대통령을 누군지 좀 압니다. 

41년생 11월 20일생 그는 미국의 46대 대통려이고 아일렌드계 출신입니다. 

현제 아내는 질 바이든인데 두번째 아내입니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교통사고로 일찍이 죽었습니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얼마전에는 맥도날드에 직접 전화걸어 선데이 아이스크림을 준문했습니다. 

이런 정보들은 구글이나 체트 지피티에 타이핑을 하면 금방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든 대통령이 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보가 나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알든 모르던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계속 안만나기 때문입니다. 

 

안다고 할때 상호적이고 경험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할때 히브리단어는 야다 입니다. 

이 단어는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에서 동침하매에서 쓰여진 단어입니다. 

동침하매라는 단어는 한 침대에 누웠다는 뜻보다 깊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부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격대 인격의 관계입니다. 

 

요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에 대한 사도요한의 독특한 정의입니다. 

영생이란 오--래 산다는 의미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의미는 경험적으로 안다는 관계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알고 나도 예수님을 아는 관계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관계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의미합니다.  

영생이란 죽은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시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마7:21-23-"

  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어떤 사람이 평생 주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평생 교회를 다녔는데 천국문 앞에서 주님이 난 너를 모른다고 하실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반대로 하나님은 과연 나를 알고 계신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쌓이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고전8:2-3,"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앎과 사랑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그냥 아는 사이를 넘어섭니다. 

서로 정보를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것을 함께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는가? 

사랑은 깊은 것입니다. 사랑은 강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숨길수가 없습니다. 

이 관계는 매우 상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결국은 지식적 앎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기도를 했습니까?

에베소성도들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에베소성도들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 배웠고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무슨 몇과정을 마침으로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알아도 그분은 다 알수 없는 크신분이십니다.. 

 

안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그노시스"란 단어입니다. 

"에피 그노시스"란 단어를 씁니다.

에피란 단어는 완전한 앎, 더 깊은, 충만한 앎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목회자로서 심정이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나 피상적으로  머물러 있지를

않기를 원했다는 것습니다. 

에피 그노시스-더 깊어지고 충만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목회자로서 심정이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더 목마른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한두번 만났는데 매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더 만나고 싶습니다. 더 교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로 더 신비롭고 더 경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 평생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을 더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 우리의 최고의 지식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신비롭고 더 경외로우신 분입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면 최고의 지식을 얻은 것입니다.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고 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을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인간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자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새로운 빛이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고 안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해야할 일이 많이 있지만 핵심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아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해져 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교회온 성도들에게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드리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뭔가를 열심히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열심을 낼때 그 안에서 모든 비밀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했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워졌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의 목회의 핵심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중심의 종교생활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만족에 빠져서 자기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다른 것에 열심을 두면 이상한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화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많이 읽는 것보다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심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갑니까?

첫번째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엡1: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헤와 계시는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게 되고

결국 순종하는데 까지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가까이할때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과의 교제하므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친하면 친할수록 계속 대화합니다. 

떨어져 있어도 계속 문자를 보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주님과 얼마나 많이 교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래 교제하면 할수록 주님을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고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인격대 인격의 만남이 교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을 맛보는 것입니다. 

맛을 본 사람은 설명이 쉽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소원해 질때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인격대 인격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다를수 있습니다. 

맛본사람은 설명이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맛본사람은 설명이 구체적입니다. 응 그맛이야!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맛본 사람은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연애와 비슷합니다. 갈수록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비밀이 쌓여져 가는 것입니다. 

간증은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상을 살아간다면 간증이 쌓여갑니다.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툭툭 치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숫양을 이삭 대신에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런 특별한 경험을 어찌 잊어버릴수가 있겠습니까?

야곱이 얍복 나룻터에서 씨름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기 힘만 믿고 살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이스라엘로 변화됩니다.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은 목자시요. 피난처시요. 방패시요. 산성이시요,....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은 나야, 불꽃가운데서 음성을 들었습니다. 

광야에서 길을 내시고 강물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가는 길에 생명력이 없다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속성과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길에 추락도 하고 시련의 구름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고통의 골자기로 지날때에 하나님이 침묵하실때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깊은 골자기에서 자기가 알았던 하나님이 얼마나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 크신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던 자신이 이제는 두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우리의 힘만으로는 힘이 듭니다. 

높은 산도 나 혼자 정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걸어간 신앙의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려면 성경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걸어가신 신앙의 선배들과 목회자들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벧후3: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로 우리가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요동치 않는 신앙으로 자랄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생활의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4: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리므로 나도 너희를 버렸다고 하십니다. 

 

신앙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신을 만듭니다.

그 신을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상을 섬기는 단계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따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신앙생활이 힘이 듭니다. 

 

부부가 오랬동안 살아도 서로 모를 수 있습니다. 

오해가 왜 생깁니까?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해가 자자지게 되고 갈등이 쌓여서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이와 같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 없이 교회 활동만 하는 사람은 신앙이 병들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치명적인 결함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 가운데도 무신론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학문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어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

학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에 내 이성으로 성경을 분해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과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지식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이라는 말은 서로 상호적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때만 찿고 내가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둡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면 찾아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구애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부부가 서로를 안다는 것은 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서로 상호적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친밀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로 목자로 친구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분에 대한 사랑도 커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것보다 복된 것은 없습니다.

 

453-내 평생의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