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눈과 영의 눈,(요한복음9:13-41)
분문에 날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나옵니다.
육의 눈이 감겨진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육의 눈은 보이지만 영의 눈은 감긴사람들입니다.
영의 눈이 감긴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정관념에 잡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점은 죄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3-4대까지 전수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이 자의 맹인된 것이 자기 죄때문입니까?
그 부모의 죄때문입니까?
소경을 만난다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도리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때 우리들은 당연히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과거가 현제를 결정한다는 것도 잘못된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된것은
본인의 죄때문도 부모의 죄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형제 자매가 어려움을 당할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구나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어려움을 당하나
하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1. 사람에게는 육의 눈과 영의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본다고 하기에 영적 눈이 감긴 자라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감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든지
마귀에게 잡혀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을 알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받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속임수가 아닙니다. 마술이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못보던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증거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축하해 줄줄 모르고 감격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면 인정하고 우리가 뭔가 잘못 믿고 있다고 시인하면
사는데 시인하지 않고 자꾸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다시 확인합니다.
네 눈이 어떻게 열렸느냐? 네번이나 반복해서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싶은 것입니다.
18-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예수님이 이 기적을 안식일에 행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된다는 율법 규정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았는데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16-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저와 여러분도 눈뜬 소경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면 고백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하면서 너도 그렇게 말하라고 겁박합니다.
25-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30-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은 그 자체로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냐?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눈먼 사람을 눈을 뜨게 한 사건이 없는데
지금 나의 눈을 뜨게 한 그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다니 바보 아닌가?
이사야35: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바로 메시야가 오시면 이러한 일들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2. 영안이 열리는 때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겁박하고 협박해도 예수님이 죄인됨을 시인하지 않으니까
유대 공동체에서 쫓아냅니다.
힘들고 어려울때 영안이 열리는 때일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다 어려움 당한다면 주님을 찾아 오십니다.
35-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8-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눈이 떠진 이 사람의 영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우리도 영안이 열리려면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시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오셨기에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세상에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다 본다고 이야기 하니까
예수님이 너희는 영원히 소경이 되어 지옥불 속에 들어갈 것이다.
보지 못하는 소경은 오히려 영안을 열어서
영원한 나라 백성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 여러분이 어떠한 손해를 입더라도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눈을 뜨게 하신 분입니다.
하고 담대히 시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합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인본주의 입니다.
신본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중심주의로 겸손함이 있습니다.
교만한 인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을 다 거부하고 거절합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 주의와 예수님주의는 영접합니다.
누가 영접합니까? 나는 부족하고 텅 비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영접합니다.
오늘도 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의 옷, 겸손과 온유의 옷, 오래참음의 옷을 입습니다.
인본주의 자들을 자기 중심적이니까 긍휼과 자비가 없습니다.
3. 영안이 열린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소경되어 태어난 사람 보면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는 늘 붙어 다닙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풉니다.
소경이 눈떴다고 하는데 안식일에 고쳤네 하면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죄인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나?
이런 사람들은 억거지를 부리고 폭력을 사용합니다. 보복합니다.
힘만 주어지면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다른 사람 억누릅니다.
힘이 있을때 목적대로 쓸줄 아는 것이 온유입니다.
세계관이 다르면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힘이 주어지면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죄인은 맹인을 고칠수 없다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 잘되도 문제, 안되어도 문제가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수용하는 것이 없어서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대표적인 사람이 애굽의 바로 였습니다.
교만이 무서운 이유는 보통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이 옵니다.
교만이란 죄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죄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우월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면 답이 없습니다.
교만의 죄는 마귀의 죄이기에 죄의식을 못느낍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깨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하면서 오히려 기도 안하는 사람을 정죄합니다.
교만의 죄는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됩니다.
교만하면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교만이란 자아로 곽찬인생입니다. 나로 곽찬인생입니다.
자만으로 자기 고집으로 곽찬인생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비어 있어서 누구라도 드러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울수 있고 은혜로 채울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자꾸 배우려고 합니다. 자꾸 받아 들입니다.
사회도 겸손해야 합니다.
사회가 교만하면 분위기가 싸늘하고 사나워집니다.
사회가 교만해지면 약자가 박해를 당하고 사치와 허영이 가득찹니다.
펙트 눈이 떠진 사실 자체를 부인하면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거짓말이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거짓말 하고 두번 거짓말하고 그러다 다 속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작 음모 술수 폭력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함은 규정을 쉽게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죄인에게는 핍박해도 되고 험담해도 되고 공격해도 떳떳합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교만이 들어오면 교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되니까 눈뜬 소경을 출교시킵니다.
마귀는 항상 폭력적이고 강제적입니다.
교회는 강제나 억지로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감동되어서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교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넘어짐의 앞잡이가 됩니다.
교만해서 내 자아가 깨지지 않으면 그 무엇도 복이 되지 못합니다.
힘을 주면 힘 자체가 폭력이 됩니다.
힘이 없으면 원망하고 힘이 생기면 폭력적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철저히 깨져야 합니다.
눈뜬 맹인은 하나만 붙들었습니다.
초점이 생기니까 불이 붙습니다.
예수님 만난 사람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수식어가 없습니다 . 말이 많지 않습니다.
두번째 대답이 같습니다. 눈뜬 맹인은 대답이 똑같습니다.
세번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걸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야 수식어가 짧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확신에 차 있습니다. 사실만 이야기 합니다.
출교 시킨다 해도 담대합니다. 안 쫄아요.
여러분도 이전에 나는 하나님을 몰랐다가 지금은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에 긍휼이 생기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담대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초점입니다. 누구에게 시선을 가는가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불을 낼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초점이 없기 때문에 멍하니 사는 인생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에게만 관심을 갖습니다. 복잡해 집니다.
맹인은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만 붙들면 희생할 수 있습니다. 가치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에게 목숨을 걸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치 능력이 나타납니다.
왜 인생이 무력해 졌습니까? 마귀에게 속아서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잡다한 인생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 말씀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할렐루야!